07-1학기 도예의 기초

인사동 탐방 및 관람기

졸업하기 전에 꼭 듣고 싶었던 ‘도예의 기초’ 수업을 결국 수강하는데 성공한 1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주위 사람들에게 무엇을 만들어 줄까 주문을 받고 있던 때였다. 가족들이 인사동 근처에서 외식을 한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인사동을 둘러보며 어떻게 만들지 안목을 좀 틔우라고 조언해 주셨다. 커다란 접시를 세 장 정도 만들어 오라시던 엄마는 당신의 접시가 제대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셨던 것 같다. 내가 예기치 않게 커다란 자기가 만들어져서 대패로 밀어가며 모양을 다듬고 있다는 얘기를 괜히 했구나 싶은 상황이었다. 한 시간여 둘러보며 사진을 찍어 두었는데, 몇몇 특이한 모양의 컵이 눈에 띄었다. 아무 생각없이 쓰던 컵이 이렇게 다양한 손잡이 모양을 가질 수 있구나, 이렇게도 모양을 잡을 수가 있겠구나, 하는 작지만 스스로 기특한 아이디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일상적인 쓰임으로부터 사물들을 해방시킬 때 그 본래적인 의미가 드러난다는 마그리트의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다음 작품을 위한 아이디어를 제법 비축해서 수업에 들어가니, 교수님이 불쑥 내주신 숙제, 인사동 탐방 및 관람기 제출. 이미 한 번 다녀왔지만, 사실은 아주 반가웠다. 컵 말고 다른 도예 작품들도 좀더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다니느라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했던 탓도 컸다. 이번에는 갤러리 위주로 여유있게 시간을 두고 다녀보고 싶었고, ‘쌈지길’, ‘가나아트스페이스’와 ‘공예갤러리 나눔’ 등 몇 곳을 축으로 해서 도자기가 보이는 가게마다 들어갔다. 사실상 모든 갤러리와 샵들이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눈치껏 뒤돌아서서 가린다거나, 주인이 한눈 파는 틈을 이용하여 사진을 찍어야 했다. 가끔 정말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은 작품이 보일 때에는 우선 찍고 보자는 심정으로 후다닥 찍고선 제지하는 주인에게 사과하고 도망나오기도 했다. 굳이 사진을 안 찍고 머리에 담아오거나 스케치를 해오면 될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한없이 변형되는 형태와 윤곽선들을 기억하려 애쓰는 것은 무리란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게다가 고등학교 2학년 이후 그림을 그리는 따위의 용도로는 전혀 쓰인 적이 없던 내 오른손으로는, 그 미묘한 뉘앙스와 느낌의 차이를 잡아낼 만큼 섬세한 스케치가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비슷비슷해 보이던 주전자, 찻잔, 술잔 같은 것들이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색감이나 질감의 차이만이 아니라, 주둥이를 말아올린 느낌이나 형태잡힌 선의 윤곽을 조금은 더 민감하게 분별해 낼 수 있게 된 것 같다. 특히 차주전자의 복잡하고도 미끈한 형태를 보면서 저걸 어떻게 만들어냈을지 경이로움과 동시에 도전의식을 느끼게 되면서, 조금씩 다른 주둥이나 뚜껑의 형태라거나 손잡이의 처리 방식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마침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차주전자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다양한 사이즈의 독특한 주전자들을 구경하면서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도 해보다가 기어코 팜플렛의 도자기 사진을 촬영했다. 아무리 머릿속에 넣어두고 기억하려고 하거나 무딘 손으로 스케치를 해보아도 그 형태를 허물어뜨리지 않고 떠올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갤러리에서 일하시는 분이 ‘도자기 공부하는 사람이 팜플렛 가격을 아끼면 어떡해? 팜플렛을 촬영하는 사람은 또 처음 봤네’라고 구박하셨지만, 정작 도예의 기초 수업을 들을 뿐인 왕초보가 도예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비쳐졌다는 사실에 마냥 흡족할 뿐이었다.



여섯 시간 가까이 돌아다니며 인사동을 끝에서 끝까지 다니다보니, 흙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빚어낼 수 있는지,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만들고 싶어졌는지 깨닫고 문득 놀라버렸다. 수업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그저 머그컵 한 세트와 화분 정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굽 모양, 손잡이 모양, 주둥이 모양 하나하나에도 무언가 의미와 느낌을 불어넣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했다. 비록 몸은 다소 지치고 피곤했지만 촬영이 금지된 이 곳에서 백여장의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과 무언가 도자기를 보는 안목이 조금은 올라간 것 같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흙을 가지고 놀기만 해도 정신건강에 좋다는 뉴스가 최근에 보도된 적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도예 수업을 듣는 네 시간동안 꼼짝도 않고 손끝에 정신을 집중하는 작업이 너무나 매력적이라고 느끼고 있던 터였다. 가끔은 전생에 도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라는 택도 없는 망상이 머릴 스쳤지만 주위 사람들의 야무지고도 센스있는 손끝을 보면 꼭 그런 것같지도 않다는 생각도 교차한다. 인사동에서도 그랬지만, 이제는 무엇이든 보면 저걸 흙으로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먼저 생각하게 된다. 술집에서는 술잔과 술병을 보면서, 음식점에서는 그릇과 접시를 보면서 말이다.



인사동의 어느 갤러리에서 한 도예가가 남긴 글귀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적어왔다. 비록 이 정도의 쾌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기는 건방진 초짜지만, 그래도 흙을 만지면서 이런 비슷한 즐거움을 얻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주전자는 참 재미있다.


꼭지를 만들 때는

젖꼭지를 연상하며

뚜껑을 여닫을 때는 살갗이 닿는 느낌으로,

몸통은 둘이 한데 어울어지는 감각이 일게 만들었다.


절정은 注口를 통해 흐르는 물을 느낄 때이다.


이렇게 보고 만지고 느낀 상상까지 확대할 수 있는

주제는 그리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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