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끝났다. 한달여 나의 의지에 오롯이 맡겨졌던 시간이 다시 내 아쉬운 주먹을 희롱하며 어딘가로 풀려난다,

사막의 모래처럼. 아주아주 크고, 딱딱한 책갈피 하나를 꼽아 넣은 느낌이기도 하다. 이왕이면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검정빛, 가죽냄새도 약간 나면 좋겠다.


8주마다 나오는 휴가와, 제대휴가를 온통 노가다판에서 보내며 모았던 돈이었다. 못을 밟아 피가 흐르는 발바닥을

뽁뽁 쳐대며 죽은 피를 뽑아내주던 작업반장의 망치질이 웃기기만 했던 건, 그래도 제대하고 나서 '군대에서 공찼던'

기억만 잔뜩 이야기해대는 '복학생'이 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군대라는 웅덩이에 내가 담겨 있었단 사실이 저만치 예전의 일인 양 스스로에게 낯설어진 것에 대해

감사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다합의 해변에서 되짚어 보았던 '나'라는 것으로부터 한걸음 더 멀어졌다는

얘기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했던 xx살의 나, 하루키의 매혹적인 이 표현을 쓰고 싶어서 난 23, 22, 21,그런 식으로

나라고 불려왔던 것이 밟아온 무대와 주어진 씬, 그리고 허용되었던 애드립과 - 사실은 스스로 알고 있었을 - 대사들을

충분히 떠올려 보고, 그게 뒤늦게 내게 의미했던 '필연성'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들과 같은 진실을 담은 온갖 표현들, 하지만 그것이 살아있는 울림을 갖고 효용을 갖는 것은

이미 그 진실이 자신의 지나간 과거로 굳혀진 이후일 뿐이다. 그처럼. 나의 과거도. 다행인지, 아직 크다란 후회나 참담한
 
고뇌를 되씹을 만한 상처를 입지 않은 내게, 미래란 언제나 여전히 최초의 반짝임을 그대로 간직한 신품의 크리스탈과

같다. 그리하여 불행인지, 무언가 바람이 바뀌어 불 때마다, 나는 노심초사하며 나를 되짚어보고 지금 나의 꿈을

생각한다. 혹여나 최초의 균열, 내지 최초의 후회-돌이킬 수 없을 만한-가 이로부터 비롯되지는 않을지, 여태 아무런

흠집없이 나름대로 명민하던 그 반짝임이 드디어 뭉그러지고 무뎌지는 건 아닌지. 혹은 이미 그리 되었는지도

모르겠으되, 그토록 커다란 책갈피의 느낌을 갖는 지금 다시금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없다.


여행은, 맨 몸이었다. 룩소르에서 10여시간 자전거를 타고 물통 네 개를 아작내거나, 17시간 버스에 구겨진채 버티거나,

혹은 등짐을 메고 왠종일 거리를 걷거나. 그러한 순수한 육체적인 깡다구로서의 의미 외에도, 이른바 계급장 다 뗀
 
상태에서의 맨 몸이었단 뜻도 된다. 혹자는 김일성의 한국이냐고 되묻기도 하는 그런 내 나라주소, 거기에 알게모르게

내 등뒤에 버티고 섰던 온갖 상징들-학력, 나이, 재력, ..이른바 사회적, 문화적인 자본이랄까-이 훨씬 희미하게

드러나는 곳에 순간적이나마 벌거벗겨졌다. (물론 여행자로서 달리 획득하는 또다른 온갖 외투들이 순식간에 다시

입혀지지만..)


그곳에서 내 앞에 펼쳐질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는 이야기는 곧 내가 돌아올 곳에서 다시 꿰어입어야 할 내 친숙한

껍데기들을 하나씩 꼼꼼히 뜯어보며 각각의 가능성과 내 의사를 타진한다는 것과 같지 싶다. 현재까지 내가 있었던 곳,

바라보던 곳,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그렇게 차근차근 지금의 '나'란 것에 대해 반추해보고, 그것이 어느쪽으로

얼마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 또 해는 앞으로 어디로 움직여 그림자가 얼만큼 어디로 길어지게 될지. 그래봐야

고작 한 뼘이겠지만.


생각이란 놈도 일정량의 치사량이 있는 듯하여, 술에 먹히는 경우 바로 게워내짐이란 행위로 다시금 술을 잡아먹을

준비를 가다듬듯, 생각이 잡다하게 얽히고 섥혀 결국 갈피를 못잡게 되면 다시금 토해내고 그 어느 맘 잡히는대로의

꼬투리에서부터 잡념을 이어가는 듯하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알 수 없는 건 알 수 없는 것.


그냥 가보는 거야, 라고 신해철이 '절망에 대하여'에서 절규했듯..그렇게. 역시나 답은 없이 고작 불타오르는 양광 아래

한뼘의 그림자로 방향을 가늠해볼 수 밖엔 없을 거 같다. 고대 이집트에선 그림자란 그 사람의 생명을 보호한다고

믿어졌다던가.


여행이 끝났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을, 내가 정말 그것을 하고 싶어서 할 수 있다면, 노심초사 따위 고이접어
 
나빌레라.ㅋ



* 지금보다 낫던 그때의 마음과 정신상태. 아아..바쁘게 살기엔 삶이 짧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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