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주는여자 #영화 #윤여정 #이재용

죽여준다는 표현이 갖는 이중성, 말그대로 죽여주겠다는 살벌한 의미일 수도 있고, 또 죽여줄만큼 좋다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영화는 그렇게 두가지의 '죽음'을 (남자에게) 가져오는 사신같은 여자 윤여정의 인생과 현재를 담담하게 따라간다. 마치 포스터 속 그녀의 복잡해 보이면서도 멍해보이는 표정 그대로. 대체로 그건 수동적이고, 왠지 알아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비극에 맞부딪힌 자의 표정이다.

등장인물들간의 욕망이 향하는 세기나 방향을 바탕으로 등고선지도를 그려보면 어떨까. 윤여정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욕망의 등고선은 두가지 죽음,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의미 모두에 있어서 그렇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탑골공원의 시든 남성들은 그녀를 빌어 죽음같이 좋은 섹스를 맛보고자 하고, 또 그렇게 시든 남성들은 그녀를 빌어 죽음조차 불러오려 하니까. 그녀는 모든 (남성들의) 욕망이 흘러내려오는 곳, 배꼽같은 저지대일 뿐이다. 그녀의 삶은 늘 그랬으니까, 어쩌면 그 표정은 지쳐 체념한 데서 비롯한지도 모른다.

주변인물들은 상대적으로 다소 복잡한 지형을 보인다. 오타쿠같은 장애인 남성, G-spot이라는 야릇한 이름의 트렌스젠더바에서 일하던 트렌스젠더. 이들은 영화의 욕망이 단순히 남녀의 이분법으로만 읽히는 걸 막고 좀더 건전한 욕망의 교류, 등가교환에 가까운 뭔가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섹스관광의 결과로 태어난 코피노(코리안+필리피노) 꼬맹이. 윤여정에게서 뻗어나가는 유일한 욕망 한가닥이 있다면 그것, 그 꼬맹이를 통해 과거 젖도 못뗀 아이를 입양한 기억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한가닥 욕망조차 제대로 채우기 쉽지 않다. 방해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그녀를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남성들)의 욕망이 사회의 전지적인 권한을 침범하는 시점. 구성원의 삶과 죽음에 대해 전권을 행사해야 하는 사회는 그 통제를 벗어난 늙은 남성들의 잇단 죽음을 주목한다. 영화속 현실에 충분히 노출된 지금의 현실, 고 백남기농민이나 한상균 민노총위원장의 뉴스가 그 사회가 가진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들이었다면, 이제 그 힘으로 윤여정을 단죄해 위신을 유지할 때인 거다.

그렇게 그녀는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죽여주는 여자가 되어 평생을 살았고, 자신의 작은 욕망 하나 채우지 못한 채 삶을 마친다. 대체 그녀의 삶은 뭐였을까, 아니. 이렇게 묻는 건 스크린 너머 내가 그녀의 삶에 여전히 코박을 만큼 가깝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제각기 남들이 알 수 없는 내밀한 속사정과 맥락이 있는 법이고, 그녀의 삶 역시 나름의 만족과 안온함이 있었으리라.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손을 빌어 세상 밖으로 구출해낸/죽여버린 그들의 감사함에서 작은 의미를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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