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세계도 있을 수 있음을 몰랐다.

'여행'이라는 방법만이 외국을 접하는 유일한 통로였던 때에는, 여행자의 카메라와 시계 등속에 관심을 보이며

서툴게 말을 건네던 길 위의 행인들이 그 나라의 얼굴이었다. 마주치던 그 나라의 풍경 역시 대부분 길위에서,

어느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해 가는 그 선상에서 마주한 것들이었다. 바람이 불고, 하늘이 보이며, 땅을 밟는.

설혹 박물관이나 기념건물 등의 실내로 들어선다 해도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신기하게 바라볼 태세가 되어 있는

여행자의 시각으로, 뭔가 그 장소에서 그 나라가 보여주려는 걸 동조해 보려고 노력하면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출장이란, 출장으로 떠난 나라를 맛본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도 않지만 또 다른 이야기같기도 하다.

물론 출장이라고 해도 다양한 방식과 목적을 가진 출장이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떠난 출장은 호텔에서 호텔로

전전하며 비즈니스상담회를 진행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더욱 다르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봤던

건, 여행자로서 부닥뜨리게 될 세계와는 또 다른,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지만 엄청 다른 풍경을 보이는 세계였다.

같은 사우디라 해도 호텔 내에서 하늘 한번 바라보지 못하고 해가 뜨고 지고 하는 그런 조건에서 보이는 사우디는

당연히, 사우디가 외부에 보여줄 준비가 된 관광지-그게 실내 장소이건 실외 장소이건 간에-를 둘러보며 느끼는

사우디랑 다른 게 당연할 게다. 그러니 자칫 출장을 나가 된통 고생하고 온 나라에 대해서는 첫인상은 첫인상대로

구기고, 제대로 본 건 없지만 그렇다고 안 갔다고 할 수도 없게 되어 버리니, 선배들 이야기대로 그 나라와의

관계를 망치기 십상이겠다 납득이 간다.


그렇지만 최대한, (할 일은 하면서도) 여행자의 시각을 갖고 비즈니스의 세계 호텔을 둘러보고, 짬나는 시간마다

창밖을 둘러보려고 애쓰다 보니 또 나름의 쏠쏠한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같은 호텔 건물이라 해도, 여행자에게는 아늑한 휴식의 공간, 출장을 나온 직딩에게는 밤 두세시가 지나도록 일을

하는 작업의 공간. 이틀만에 옮겨야 하는 일정인지라 가방은 다 풀지도 않고 저렇게 쩍하니 입만 벌려놓았다.

아무리 호텔의 백열등이 그 불빛의 세례를 받은 것들을 고급스럽고 아늑하게 보이도록 마법을 걸어준다 해도,

이 정신사나운 풍경마저 그렇게 감싸기란 쉽지 않다. 생각보다 환시(幻視)란 건 조건이 까다로운지도.ㅋ

호텔방에 들어서자마자 한 일은 한 켠의 화장대로 쓰일법한 테이블 위를 싹 밀어내고는 노트북과 휴대용 프린터를

설치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사우디는 220볼트 돼지코 콘센트가 그대로 쓰인다. 카타르나 쿠웨이트는 별도의

호환 플러그가 필요하다.

잠시 호텔을 나서 저녁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쇼바가 꺼졌는지 잔뜩 출렁이는 차에서 운전자 뒷좌석서 겨우 찍은

사진에서는 불빛들이 팔분음표를 그리고 있다. 내가 이 사진을 찍으면서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다른 중동

국가들처럼 사우디 역시 직업군에 상당히 강고한 위계가 있으며, 그 위계 내 '하층 직업'을 차지한 사람들은 대부분

서남아 등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란 거다. 예컨대 택시기사는 인도/파키스탄 사람,(인도사람은 또한 중동의 오일

머니를 실제로 운영하는 중간관리자 역할을 장악하고 있기도 하다) 청소부는 방글라데시 사람, 트럭운전수는

어느나라 사람, 이런 식인 게다. 택시기사란 직업은 우리나라랑 크게 다르지 않은 조건인지, 사납금을 일정액씩

매일 납부를 해야 하는데, 그걸 채우기도 벅찬 데다가 아저씨 삶을 꾸리기 위해서는 하루에 18시간씩 운전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푸념하는 아저씨. 그 얘길 들으면서 문득 불안해졌었다.

이 차가 이렇게 꿀렁이는 게 단지 아스팔트 바닥면의 문제라거나 차의 쇼바 문제가 아니라, 급출발 급제동을

반복하며 잠을 쫓아내는 아저씨의 발놀림에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행사장이 세팅된 Najd룸은 인테리어가 특이한 거 같다. 거울을 별 모양으로 천장이고 벽면이고 할 거

없이 붙여놓았고, 심지어 나즈드룸에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기둥조차 이런 식으로 별모양으로 세워

놓고는 유리로 감싸 버렸다. 이게 몇각별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랍권의 문화와 맥이 닿아 있는 걸까.

지배인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해놓고 까먹어 버렸으니, 여전히 답이 나오지 않은 궁금증.

상담회가 시작되고, 나는 현지 바이어들이 한명씩 제대로 스케줄에 맞춰 오고 있는지, 상담은 문제없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챙겨놓은 오렌지 주스 한잔을 홀짝대기도 쉽지 않을 만큼

정신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사우디의 바이어들이 살짝 원망스러우면서도, 성황을 이루고 있단 사실

자체가 뿌듯하기도 했다.

중동의 거상이나 거물정치가를 떠올릴 때 당연히 연상하게 되는 저 머릿수건. 평소 궁금했던 점은, 저 색깔이나

디자인, 혹은 착용방법이 본인의 신분이나 위치를 드러내는 걸까 하는 거였는데, 아니랜다. 빨간 격자무늬를 하던,

민무늬 하얀천을 하던, 띠를 두르던 안 두르던 아무 상관없이 그냥 패션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런 머릿수건을

하고 하얀 긴팔소매 치마옷을 입고 온 사람들은 딱 보기에도 유한계층이랄까, 그런 느낌이다. 뛸 수도 없고 손을

놀려 일할 수도 없는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 이들은 마치 18세기 조선에서 유행했다던 넓은 소매 옷을 입고

유유자적하던 양반들을 떠올리게 한다. 생산하지 않는 계층으로서의 과시일까.


그치만 아랍권에 왔다는 실감을 느끼게 해주니, 양복차림새보다는 저런 차림새로 상담하러 온 사람들이 더 반가운
 
건 인지상정. 또 계속 보다보면 은근히 매력있는 옷이라고 느끼게 된다. 옷에서 흘러내리는 주름이라거나, 몸의

윤곽을 살짝살짝 드러내주는 그 부드러운 재질감이라거나.


참, 저 머릿수건을 벗겨내면 유대인들이 쓰고 있는 조그마한 모자같이 생긴 게 나온다. 유대인의 문화(혹은 종교),

아랍권의 문화(혹은 종교)가 기실 한끝 차이임을 드러내는 거 같아 유쾌한 발견이다.

오찬을 위해 이동한 곳 천장에서 대롱대는 특이한 형태의 조명. 이런식의 형용사가 허용된다면, 왠지

"아랍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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