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오프라야 강을 남쪽으로 달리는 쾌속 유람선에 별 대책없이 올라탔다. 뭐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심정 반, 가다가 괜찮은데 있음 내키는대로 내리자는 심정 반. 의외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불쑥불쑥 솟아있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버티곤 선 오성급 호텔들이나

새로 지어지고 있는 고층빌딩들.

촌스럽다 싶을 정도의 원색을 세개나 써서 빨갛고 노랗고 초록빛나는 배가 통통거리며 지나고,

그 뒤로는 흰색으로 우아하게 뻗은 유람선, 그리고 턱없이 불끈 솟아오른 완강한 빌딩의 뼈대

사이엔 뭔가 적잖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너무 크고, 혹은 너무 작고.

뱃전에 선 아이들은 아주 신나셨다. 사방으로 손가락을 찔러대고, 격한 강바람을 온몸으로

즐기면서 속절없이 부어지는 햇볕 아래 펄쩍대고 있었으니까.

유람선이 짜오프라야강의 마지막 역인 '오리엔탈' 역에 멈춰섰다. 그 전역, 전전역, 전전전역에서

내릴까 말까 갈등하다가 강바람이 좋아서 그냥 끝까지 와버렸다. 배 위 이층탑 위에서 배를 조종하던

마도로스 아저씨의 선그라스가 반짝, 빛났고 나는 내려서 '유럽의 어느 길'을 옮겨놓은 듯 하다는

오리엔탈 역 근처를 걷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찾아도 '유럽길'을 옮겨놓은 듯 하다는 고풍스럽고 세련된 느낌의 거리는 간데없고

그냥, 여느 방콕의 거리랑 비슷한 거다. 관광지 쪽에만 집중된 밀도높은 사람들, 활기 같은 것들이

벗겨지고 난 고즈넉하고 한산한, 적당히 허름한 거리. 그리고 어디에나 뿌리깊이 박혀있는 불교.

그랬는데 문득 눈앞에 전 교황님인 요한 바오로2세의 동상이 나타났다. 이럴 수가. 역시 이쪽 동네는

'유럽'의 거리를 옮겨놨다더니 성당도 다 보이는구나 싶었다. 자세히 밑의 명판을 읽어보니 그가

태국 방콕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걸 기념해서 이렇게 동상을 만들어 놓은 거라고 하는데,

그의 발치에 놓인 조그마한 화환이 역시 태국이구나, 싶다.

성당 내부는 꽤나 화려하다. 성당임에는 분명한데 금색 도료가 아낌없이 칠해진 걸 보면 역시

종교가 수입될 때도 나름의 문화적 맥락과 고유한 미감이 덧칠해져서 받아들여지는 거다.

그리고 얼핏 굉장히 이국적으로 보이는 천사상도, 태국스럽다고밖에 할 수 없다 싶은 건 역시

팔에 푸짐하게 둘려진 꽃다발. 노란빛깔이 강렬한 화환이 다소 가라앉은 색감의 천사상을 둥실

하늘로 띄워올리는 느낌이었다. 태국의 성당은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저런 화환 만으로도.

그리고 한참을 방황하다가 발견한 건 그 '유럽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하다는 동아시아회사.

과거 제국주의 시절 유럽 열강이 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을 경영하면서 진출했던 기업의

건물인 듯 한데, 아쉽게도 입구는 막혀있었다. 그저 겉으로만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뭐 조금

1밀리그램쯤은 유럽의 느낌이 난다고 쳐줄 수도 있겠다.

저 위의 깃대에는 어느 나라의 깃발이 휘날렸을까. 안에 들어가면 뭐가 있을까. 이것저것 꼬리무는

물음표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런 것만큼 더 확실하게 다가왔던 건 역시나, 어줍잖은 몇마디

감상평이나 가이드북 코멘트에 낚이는 건 위험하단 사실. 그래도 저 태국화된 성당의 느낌을

얻어내었으니 나름 뜻밖의 수확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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